기독교변증6(존재 증명) 신앙얘기

기독교변증6(하나님의 존재증명)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있어왔습니다. 중세 신학자 ‘안셀름’이란 신학자는 존재론적 논증으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해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란 개념의 정의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를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그분보다 더 큰 존재를 생각할 수 없는 분’이라고 정의하고, 이런 분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라는 논증을 폈습니다. ‘안셀름’의 이러한 존재론적 논증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시도라기보다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때 더 의미가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영국의 종교철학자 ‘윌리엄 팔리’가 제창한 것으로 목적론적 논증도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질서와 아름다움은 그 배후에 어떤 설계자가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의 오묘한 질서와 정교한 법칙과 아름다움과 조화가 진화론자나 다른 종교인들이 주장하듯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어떤 설계자가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고안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암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만물은 다 그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그 최초의 원인자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우주론적 논증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은 소망의 세계를 보고 확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영적인 눈이 믿음인 셈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실만 가지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공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보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과 우리가 듣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즉 우리의 감각 기능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우주를 지으시고 우주보다 더 크신 분이기에 하나님을 보는 눈은 반드시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존재를 암시하는 힌트는 몇 가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힌트들을 불신자와 기독교 신앙 사이의 접촉점이라고 합니다.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하나님 혹은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어떤 열망이 사람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갈망을 채움 받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부분을 다른 대체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 인기나 권력 같은 우상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둘째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한계와 죽음에 대한 의식,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죽음을 이기고 영원히 살고 싶다는 갈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초월하고자 열망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과 한계에 도리어 절망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직시함으로써 내가 나의 인생의 주인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다음에는 영원히 살고 싶다는 열망 자체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고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회복시켜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 번째 접촉점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윤리와 도덕에 대한 의식입니다. 비록 문화 차이 때문에 도덕적인 규범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어찌되었건 사람들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의와 불의를 규정하는 규범에 관한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 규범이 깨어지면 그것에 대한 분노나 상실감을 느끼게 되고 죄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도덕적 보편성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실 때 그 마음에 당신의 법을 심으시고 양심을 주셨습니다. 비록 죄로 인하여 그 양심이 무뎌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양심은 선악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죄와 불의로 이러한 양심의 소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고 둘째로, 그 사실을 입증해 주는 실례로는 불의가 불의로 정죄되고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내려질 때, 그리고 의가 의로서 인정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내려질 때 기뻐하는 마음을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거나 현재 저지르고 있는 죄를 숨기려고 하지만 그 죄에 대한 죄책감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를 용서받고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참되고 의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접촉점이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눈에 보여 ‘이 분이 하나님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러한 논쟁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분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기에 더욱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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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jisu2433 at 2008/12/06 10:31
하나님이라는 존칭까지 사용하면서 얘기를 전개하시지만 이미 그 말씀 속에는 증명할 꺼리는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으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말라는 위협 섞인 말씀도 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군요.

좀더 진지하게 거론 하시려면
하나님이라는 호칭도 창조론이냐 진화론이야는 개념도 모두 내려 놓으시고 이론을 전개하시는 것이 공평무사한 주장이 아닐까 합니다.
머릿 속에서 일체의 개념을 떠나서 태초 이전 순수의 마음 바탕을 근거로 탐구해야하는 것이 우선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후에 님이 믿고 싶어하는 그 존재의 여부를 파악하시고
반대 측에 서 계시는 분들에게도 그로 인해서 보다 더 설득력이 있으시면 좋겠네요.
과학이 옳으냐 성경이 옳으냐는 이분법은 탁상공론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분법 자체가 역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결론을 내 놓을 수 없는 한계점을 이미 노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그런데 또 그런 다툼을 한다면 바로 이분법이라는 수렁에 갇히는 꼴이 되지 않을까요?

하루 빨리 이분법을 넘는 사고가 전개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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