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참회록) 시얘기1

윤동주의 ‘심각한’ 아이러니
-‘참회록(懺悔錄)’ 깊이 읽기-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참회록’ 전문)

참회록이라는 장르는 중세 이후 서양의 기독교 문학에서 생겨난 자서전의 일종이다. 가장 이름 높은 참회록은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354-430)의 ‘참회록’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 헬라 철학과 수사학에 정통한 인기 있는 교수였다가 기독교인 어머니에게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후 기독교 최고의 사상가,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고백들(Confessiones)’을 일인들이 ‘참회록’으로 옮긴이래 그런 이름으로 굳어버렸는데 조금은 잘못된 듯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유명한 참회록은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다. 아마 일본인들이 많이 읽은 것이 이 책일 것이다. 그리고 18세기의 프랑스 문인 루소의 ‘참회록’도 독자가 많았음 직한데 엄격히 말해서 이 흥미진진한 책은 죄의 뉘우침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밀한 사생활 내력을 제 자랑 겸해서 털어놓은 것이니만큼 이 책은 정통적 고백록 또는 참회록의 ‘패러디’라 할 수 있는 글이다. 이 책이야말로 ‘참회록’이라고 옮기기보다 ‘고백록’이라 해야 알맞다. 어쨌든 일본인들은 위의 세 참회록을 세계 3대 참회록이라 하여 교양인의 필수 상식 항목으로 정하여 놓았다. 그런데 여기 아주 짧은 글이지만 윤동주의 ‘참회록’이 또 하나 있다. 이름난 서양의 긴 참회록들에 대한 아이러니컬한 패러디라고도 하겠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24일에 이 시를 썼다고 하는데, 이때는 그가 그 전 해 말(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을 마치고 일본 리쿄대학 입학 준비를 하면서 고향 간도에 가 있던 때다. 바로 그보다 닷새 전 19일에 그는 서울에 다시 와서 연희전문에 ‘창씨계(創氏屆)’를 제출하였다고 한다. ‘창씨계’란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한국식 성명을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라고 강압함에 따라 일본식 성명을 만들어 관계 기관에 적어낸 서류를 말한다. 친일파는 물론 기꺼이 앞장서서 그리했고 일본인과 공식적인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 정식으로 학교에 입학하고 다닐 사람들, 일본에 다녀와야 할 사람까지 그래야 했다. 일제 말까지 한국인의 근 80퍼센트가 일본식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을 만큼 일제의 강요가 강력하고 치밀하였던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일제 때 소위 ‘창시개명’을 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지고 일종의 마녀사냥을 하고 있는데 일제 당국과 어떤 종류이든 공적으로 관련이 있던 한국인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아 두자. ‘이적 행위’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고난의 형적’이라 하겠다. 만주에 살던 윤동주의 아버지는 아들의 일본 리쿄 대학 입학을 위해 고향에서 그보다 얼마 전에 평소동주(平沼東柱, 일본식 발음으로는 히로누마도슈)라고 동주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계출’(屆出, 일본식 용어)하였다고 한다. 1931년 만주 사변 이래 간도는 이미 일본제국의 한 괴뢰인 만주국이 되어 그 지배하에 있어 일본의 정책대로 해야 했다. 그리고 1937년에는 일본군은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여 파죽지세로 중국의 동부 해안을 따라 점령해 갔다. 군국주의 일본은 유럽의 독재정권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고 그들이 1939년에 전쟁을 일으켜 유럽과 아프리카의 큰 지역을 점령하자 유럽이 동양에 힘을 뻗치기 어렵게 된 상황을 이용하여 1941년 12월에 하와이에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를 선제공격하는 동시에 인도차이나 반도와 남태평양 열도로 진격하여 단시일 내에 점령했다. 일본의 온 국민과 조선의 수많은 백성까지 일본이 동양 천지를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으로 통일하여 일본 왕의 영원한 지배하에 둘 것이라 믿고 굉장히 우쭐했다.

윤동주가 자기 시에다 ‘참회록’이라는 제목을 붙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실로 수많은 국내 문인들이 - 이 중에는 윤동주가 매우 존경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 바로 얼마 전까지 민족주의적,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적, 예술지상주의적, 주지주의적 태도와 주장들을 고집하였던 ‘부끄러운’ 사실을 통감하고 ‘황도문학(皇道文學)’에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글을 조선어로 또한 ‘국문[日語]’으로 앞 다투어 발표했다. 그들은 일본의 절대적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은 우리말은 버릴 때가 되었으며 치욕의 우리 역사를 버리고 일본 역사를 ‘국사’로 삼아야 하며 민족주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따위의 ‘타락한’ 서양 사조를 배격하고 일본 왕을 떠받드는 ‘국민’이 되어 ‘황군’의 최후 승리를 위하여 단결하자고 떠들어댔다. 수많은 예가 있지만 신문학을 창조하여 한국 문학의 수장으로 추앙받던 이광수가 1940년 10월 1일 일제 관제 신문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우선 한글로 ‘조선문학(朝鮮文學)의 참회(懺悔)’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고 이어 ‘국문[日語]’으로 여러 번에 나눠 ‘참회’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우리 글로 된 ‘참회’의 주요 부분을 아래에 인용한다. 내가 古邑 역 대합실에 병합조서(倂合詔書)의 등사본을 봉독한 것은 운무 자욱한 8월 29일 아침이었다. 그때에 겨우 19세인 소년 교사인 나는 통곡하였다. 나는 합병의 진의를 오해한 것이었다. 이 오해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계속하였다. (중략)

그런데 나도 시정(始政) 30주년(‘始政 30주년’이란 1910년 8월29일 국권이 강탈되어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지 30주년이 되는 1940년 8월 29일을 말한다. 이 글은 1940 10월 1일에 발표되었다.)의 이 날에 내 문학의 동지들과 과거 30년간 내 졸렬한 글을 읽어 주신 독자에 대하여 진심으로 참회하고 사죄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경우에 달하였다. 그것은 내 문학의 태도에 그릇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략) 내가 내 평생의 창작 중에 인생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일관한 바 있는 것을 그윽이 자부한다. 다만 내가 이에 참회하는 것은 민족 관념에 대하여서이다. 이경훈 편역, ‘춘원 이광수 친일문학전집 2’(평민사, 1995), 120쪽. 이광수는 이즈음 ‘참회’라는 말을 애용한 듯하다. ‘경성일보’ 1940년 10월 1일부터 시작해서 며칠에 걸쳐 일어로 일본 왕에 대한 감사와 충성이 넘치는 글을 연재했는데 2일에는 「나의 참회」라는 제목으로, 3일에는 「거짓 없는 참회」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경훈, 128, 127쪽). 「학명기鶴鳴記」란 글에서도 ‘몸, 입, 마음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옵니다’고 했다.(‘신시대’, 1941.3. 이경훈 180쪽) ‘참회’는 깊은 종교적 죄책감에서 생기는 것인데, 일본 왕에 대한 불복종, 불충성을 종교적인 죄였다고 회개하는 것이다. 불교도라는 그가 ‘황도(皇道)’라는 사이비 종교에 그토록 심취할 수 있었다.(필자 강조)

이것이 바로 이광수의 ‘참회록’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를 존경하였다는 그는 분명 그의 유명한 ‘참회록’을 읽었을 것이며 (물론 그것을 일본식의 ‘인도주의’로 이해, 즉 오해하였을 터이지만.) 아마도 거기서 그의 글의 제목을 암시받았음 직하다. 바로 이 시기, 우리 문학사에서 암흑기라 부르는 이 시기에,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다녔고 또 일본 리쿄 대학에 영문학을 공부하러 유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연희전문에서는 아직 한국사, 한국어 등이 몰래 강의되었지만 곧 숙청당할 운명에 놓여 있었고 우리말은 물론 영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들이 우리나라 모든 학교에서 추방당하기 직전이었다. 분명 한동안 이광수를 존경했을 터인 윤동주가 이광수의 그런 ‘참회록’을 보자 그의 실망, 절망, 통분이 어떠했을까! 게다가 ‘‘우리는 힘차게 나가자. 자발적으로, 모든 조선적인 것을 벗어 내던지고 일본인이 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젊은 친구 중에는 점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갑니다’고, 이광수가 고등교육 받은 우수한 조선 청년들에 대하여 매우 낙관한다 하였음에랴!

사실상 1940년 ~ 45년간에 이처럼 ‘황도문학’에 앞 다투어 뛰어들었던 윤동주 또래의 청년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그중 몇 사람을 내놓고는 거의 모두 광복 후에는 문필 활동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일제하의 반도인 아닌 한국 사람으로서의 글쓰기를 전혀 배운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철두철미 일본인으로 교육받아 성장하였다. 그중 다수는 일상생활에서도 한국어를 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나중에 한국의 각급학교의 교사, 교수들이 되었다. 일제 35년은 짧았지만 아주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니까 윤동주는 이광수가 희망을 가졌다는 우수한 조선 청년 중에 끼이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동주는 ‘참회록’을 썼다. 이렇게 하여 이 시기에 한국 문학에는 정반대의 이유를 가진 두 종류의 ‘참회록’이 나타난 셈이다. 자기가 저지른 죄를 깊이 뉘우치는 것이 ‘참회’이니 윤동주가 깊이 뉘우칠 만한 죄란 무엇이었을까? 수백 년 이어 오던 자기 집안의 이씨 성을 고집한 것을 이광수는 크게 부끄러워하여 ‘참회’하노라 했고 香山이라는 일본 성을 갖게 된 것을 한없는 황은(皇恩)이라 하여 감사했는데 마찬가지로 수백 년 변함없이 써오던 윤씨 성을 그가 일본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기 위하여 ‘히로누마(平沼)’라는 기괴한 일본식 성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에 그는 참담한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조선 왕조를 일인들과 일인에게 배운 한국인들이 ‘이씨 조선’이라고 격하해서 불렀을 뿐 아니라 친일파들은 한사코 모든 조선적인 것을 없애고 진짜 일본인이 되자고 했다. 모든 조선적인 것은 부끄러운 것뿐이요, 일본적인 것은 세상에 제일 자랑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오늘의 일본식 거울이 아니고 오래 묵었을 뿐 아니라 오래 안 쓰고 버려 두어 푸른 녹이 슨 청동 거울에 희미하게 비추이는 자기 얼굴은 아무래도 이광수 등이 타기하여 마지않는 조선 청년의 모습이다. 그러나 확실히 지금은 빛이 바랜 것 같은 장구한 조선 역사에 속한 그것이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의문은 ‘과연 욕된 것이냐!’하는 항의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아이러니이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참회의 글’은 이광수가 먼저 여러 번 명문으로 썼다. 그러나 윤동주는 이광수처럼 구구하게 길게 ‘참회의 글’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이광수는 1940년 10월 1일 일본의 소위 합병 30주년 기념일에 50평생 조선 민족의 독립을 위하느라고 일본의 선의를 ‘배반’했던 것을 깊이 뉘우친다고 ‘참회’하면서 앞으로 일본인으로서의 기쁨과 영광만이 남았다고 썼지만 윤동주는 단 한 줄로 ‘만 24년 1개월을 아무 기쁨 없이 살았고 앞으로도 기쁨을 바랄 수 없다’고 쓸 것밖에 없다고 ‘참회’한다. 그는 투쟁적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다만 조선인으로서 24년을 괴로움 속에 살아온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 앞잡이들은 조선 청년들에게 자꾸만 ‘참회록’을 쓰라고 꾀고 강요한다. 그런 ‘참회록’을 쓰는 날은 과거를 뉘우치고 앞날의 기쁨을 받아들이니 ‘즐거운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사람으로서는 죽는 날이다. 여기서도 윤동주의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참회록의 내용은 ‘그 젊은 나이에 그런 부끄러운 고백을 했습니다’일 터인데 겨우 24세밖에 안 된 그가 그보다 더 젊은 나이에, 이를테면 평양 숭실중학에 다닐 때나 용정에서 학교 다닐 때, 무슨 ‘부끄러운 고백’을 하였을까? 아마 일본 앞잡이가 보기에 ‘부끄러운’ 고백일 터인 일제에 반대하는 말을 했을 듯하다. (그러나 이 시를 쓴지 불과 1년 반 만에 그는 체포되어 형무소에서 일본 관헌의 강요로 ‘자백서’를 썼다. 내용은 물론 과거를 ‘참회’하는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 강압된 ‘참회록’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또는 해석을 아주 달리하여, ‘내일이나 모레나’, 즉 가까운 장래에 조선이 일본의 압제를 벗어나는 ‘그 어느 즐거운 날에’ 그는 ‘시 공부 하고 싶어 하는 수 없이 부끄럼 무릅쓰고 일본식 이름으로 바꿨었습니다’고 또 다른 고백참회를 할 것을 암시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민족 해방의 날을 ‘그 어느 즐거운 날’이라는 다소 비아냥거리는 낌새가 느껴지는 표현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이런 조선 청년으로서의 ‘참회’와 ‘고백’ 이면에는 윤동주가 밥벌이가 될 만한 공부도 아닌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어 부모가 간도에서 힘들여 마련하는 학비로 일본 대학에 유학하려고 수백 년 이어온 성씨까지 ‘히로누마’로 바꾸었다는 엄연한 사실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참회록’일 터이지만 창씨를 철회하고 일본 유학을 그만두겠다는 무서운 결심을 채 할 수 없음이 그의 한없이 아픈 부끄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문학에 대한 열의가 그의 그러한 부끄러움을 억지로 눌렀다고 하겠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모순에 대한 쓰라린 아이러니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일본을 미워하면서도 일본에 유학하고 간혹 일본 문화의 어떤 대목을 경탄한 많은 조선 청년의 착잡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우리는 여기서 자기의 뚜렷한 현실적 목적 때문에 자칫하면 잊힐 수 있는 조선 사람으로서의 의식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에 되살리곤 하는 윤동주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왜 청동 거울을 손바닥뿐만 아니라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고 하는가? 손과 발은 사람이 일하러 움직일 때 함께 쓰는 지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손발이 맞는다, 손발을 움직이다 등등의 말을 한다. 그러니까 손바닥, 발바닥으로 거울을 닦는다는 말은 온몸으로 닦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굳이 ‘발바닥’이라는 비속한 말을 쓴 것은 흐려진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아이러니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처음에 그는 희미한 거울에서 자신의 욕된 얼굴 모습을 보았다. 이제 시의 끝에서 그는 별똥이 떨어지는 밤하늘 밑에 홀로 걸어가는 자기의 뒷모습을 본다. 이 시보다 얼마 전에 그는 ‘별똥 떨어진 데’라는 수필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을 가리켜 ‘자조(自嘲)하는 한 젊은이’라고 하고,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시에서 그는 과연 별똥이 떨어지는 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 또는 별똥의 방향과는 등을 돌리고 가는 것인가? 별똥이 아닌 ‘운석’은 그가 갈 곳을 과연 암시라도 해 주는가? 운석이란 떨어지는 별이니 희망이 완전히 없어짐을 뜻하는 것은 아닌가? 아마 다소라도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연전 시절에 비하여 일본 유학을 앞둔 일본식 성명을 가진 그는 조선 청년으로서의 의식을 간신히 되살릴 수는 있지만 앞날에 대한 희망이 거의 꺼져버린 것을 ‘고백’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밤에 몰래 녹슨 구리거울을 온몸으로 억지로 닦아 거기 비치는 ‘욕된’ 자기 얼굴이나마 희미하게 확인할 수 있고 떨어지는 별 밑에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이라도 보이지만 얼마 안 있어 청동거울이 완전히 녹슬어 없어지거나 별똥마저 완전히 떨어지고 완전한 어둠이 지배할 때에는 그 모습도 자취를 감출지 모른다는 한없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그가 쓸 수 있는 ‘참회록’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참회록’이라는 제목의 심각하기 그지없는 아이러니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오늘날 오랜 옛날이 된 그 시대의 아픔을 거의 알지 못하는 세대들이 아주 쉽게 왈가왈부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지를 다시 한번 반성하게 해 준다. <이상섭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