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반묘(斑猫)) 시얘기1

-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우리라 -


1. 얼룩 고양이를 노래한 시
시인 이육사의 작품 가운데 「반묘(斑猫)」라는 시가 있다. 이 작품은 원래 1940년 3월 잡지 『인문평론(人文評論)』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육사가 세상을 떠난 뒤에 해방이 되자 그의 작품들을 모아 엮은 첫 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서울출판사, 1946)에도 이 작품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어느 사막(沙漠)의 나라 유폐(幽閉)된 후궁(後宮)의 넋이기에
몸과 마음도 아롱져 근심스러워라

칠색(七色) 바다를 건너서 와도 그냥 눈동자(瞳子)에
고향의 황혼(黃昏)을 간직해 서럽지 안뇨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山脈)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너라

그 적은 포효(咆哮)는 어느 조선(祖先)때 유전(遺傳)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우리라

그보다 뜰안에 흰나비 나즉이 날라올땐
한낮의 태양(太陽)과 튜맆 한송이 지킴직하고
---육사시집(陸史詩集)(서울출판사, 1946) 53-54면.

 
이 시에서 노래하고 있는 시적 대상은 제목 그대로 얼룩무늬 고양이다. 전체 10행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2행씩 각각 짝을 이루어 시적 의미를 구성한다. 고양이의 눈동자(3, 4행)에서 고향 땅의 황혼을 읽어내기도 하고, 사람의 품에 안기는 고양이의 움직임(5, 6행)을 게으른 산맥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조그맣게 들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7, 8행)를 가늘고 잔잔한 '마노의 노래'에 견주기도 한다. 시 자체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적인 느낌 위주로 하고 있지만, 시각적인 심상의 표현 자체가 시적 공간을 크게 확장시켜 놓고 있다.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되었던 『인문평론』을 보면 시집에 수록된 작품의 몇 군데 그 표기가 달라진 곳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시의 제목에서 '반묘'의 한자 표기가 '班猫'로 되어 있었는데 시집에서 '斑猫'로 바로잡았다. 6행의 '느낄사록'은 당초 그 표기가 '늣깃사록'으로 되어 있었고, 마지막 행의 '지킴직하고'는 '직힘직하고'로 표기되었던 것을 고쳐쓰고 있다.
 

2. '잔조우리라'라는 시어의 쓰임
이 작품에서 일상적인 말에 익지 않은 시어를 하나 찾는다면 다음 구절의 맨끝에 나오는 '잔조우리라'라는 말이다.
그 적은 포효(咆哮)는 어느 조선(祖先)때 유전(遺傳)이길래
마노(瑪瑙)의 노래야 한층 더 잔조우리라

이 단어는 그 형태론적으로 그 짜임새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간과 어미를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표기된 대로 인정한다면, '잔좁다' '잔조웁다' '잔조우다' 등 가운데에서 그 기본형을 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모두 『국어대사전』(이희승)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 『한국현대시 시어사전』(김재홍편)을 보면, 바로 이 작품의 '잔조우리라'라는 말을 그 용례로 삼아 이 말의 기본형을 '잔조웁다'로 표기하고 있지만, 그 용례를 바로 이 작품에서 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북한의 『조선말 대사전』에는 이 말과 유사한 '잔조롭다'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다. 최근 출간된 『표준국어대사전』(국립국어연구원)에서는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 등재된 것을 그 용례까지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잔조롭다'는 말은 '움직이는 모양새가 가늘고 잔잔하다.'로 그 의미가 설명되어 있으며, '잔조롬하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강위에는 잔조로운 물결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와 같은 용례도 있다. 그런데 '잔조롭다'는 말은 우리 현대시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 현대시 시어사전』의 경우, '피리 젓대 고운 노래 잔조로운 꿈을 따라'(조지훈,「舞鼓」), '백제와 신라의 백성들이/ 잔조로히 모여사는 곳에'(신석초,「바라춤」) 등을 예시한다. 여기서 '잔조롭다'는 말은 모두가 '잔잔하고 조용하다'는 뜻을 지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육사의 시에 나와 있는 '잔조우리라'는 말이 '잔조롭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필자는 '잔조우리라'가 '잔조로우리라'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단어 표기 자체가 오기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만일 '잔조로우리라'에서 어떤 이유로 '-로-'가 탈락하여 '잔조우리라'가 될 수 있다면, 이는 더할 말이 필요 없는 일이다. 이같은 현상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잔조로우리라'에서 '-로-'가 탈락된 오기로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말의 기본형도 '잔조롭다'로 고정시킬 수 있으며, 이 시어의 표기도 자연스럽게 '잔조로우리라'로 바로잡아 놓아야 할 것이다.

3. '등을 굽히는 짓새'의 의미
이 시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시어가 '짓새'라는 말이다. 고양이가 사람의 품에 들어와 안기면서 등을 굽히는 몸짓을 하는 모양을 묘사한 대목에 '짓새'라는 말이 나온다. 느릿한 고양이의 동작에서 느끼는 게으름과 한가로움의 느낌이 이 구절에 담겨져 있다.

사람의 품에 깃들면 등을 굽히는 짓새
산맥(山脈)을 느낄사록 끝없이 게을너라

여기서 쓰인 '짓새'라는 말은 사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말은 그 형태가 '짓+새'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짓'은 '몸을 놀려 움직이는 일'을 말한다. 이 말은 홀로 쓰이지만, 몸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는 말에 붙여 쓰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몸짓, 발짓, 손짓, 날개짓 등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새'의 경우는 사물의 모양, 형태, 정도 등을 나타내는 접사이다. 일부 명사나 동사의 명사형 뒤에 붙어서 그 꼴이나 됨됨이를 표시한다. 이 말은 홀로 쓰이지 못하기 때문에, '모양새, 옷매무새, 걸음새, 먹음새, 생김새, 차림새' 등과 같은 말에서처럼, 그 의미를 되풀이하여 드러내어 준다. 그러므로 '등을 굽히는 짓새'라는 구절은 '등을 굽히는 움직임의 모양'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시인은 고양이가 등을 굽히며 움직이는 모양을 '짓새'라는 말로 표시한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일상적인 언어에서 잘 쓰는 말도 아니지만, 시인 이육사가 활용하고 있는 시어로서 그 새로운 맛을 더하고 있다.

4. 이육사의 요절이 애달픈 까닭
이육사는 생전에 시집을 발간하지 못하였다. 고향을 떠나 만주 등지를 헤매던 그가 목놓아 불렀던 노래들은 해방도 제대로 맞지 못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해방이 되자, 함께 문학을 논했던 시인 신석초, 김광균, 오장환, 이용악 등이 그의 시들을 한데 모아 『육사시집』(1946)이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시집을 엮었다. 이 시집에 실린 다음과 같은 짤막한 서문은 육사의 요절이 더욱 애달픈 까닭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육사의 짧은 생애를 기리는 서문으로는 참으로 의미가 깊다고 생각되어 그대로 옮긴다.

육사가 북경 옥사(獄舍)에서 영면(永眠)한 지 벌써 2년이 가차워 온다. 그가 세상에 남기고 간 스무여 편의 시를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시의 교졸(巧拙)을 이야기함은 평가(平家)의 일이나 한평생을 걸려 쓴 시로는 의외로 수효가 적음은 고인의 생활이 신산(辛酸)하였음을 이야기하고도 남는다. 작품이 애절함도 그 까닭이다. 서울 하숙방에서 이역(異域) 야등 아래 이 시를 쓰면서 그가 모색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실생활의 고독에서 우러나온 것은 항시 무형(無形)한 동경(憧憬)이었다. 그는 한평생 꿈을 추구한 사람이다. 시가 세상에 묻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안타까이 공중에 그린 무형한 꿈이 형태(形態)와 의상(衣裳)을 갖추기엔 고인의 목숨이 너무 짧았다. 유작(遺作)으로 발표한 「광야(曠野)」,「꽃」에서 사람과 작품이 원숙해 가는 도중에 요절한 것이 한층 더 애달픔은 이 까닭이다.

육신(肉身)은 없어지고 그의 생애(生涯)를 조각(彫刻)한 비애(悲哀)가 빚은 몇 편의 시가 우리의 수중에 남아있을 뿐이나 한 사람의 시인이 살고 간 흔적(痕迹)을 찾기엔 이로써 족할 것이다. 살아 있는 우리는 고인의 사인(死因)까지도 자세히 모르나 육사(陸史)는 저 세상에서도 분명 미진한 꿈으로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명(幽明)의 안개에 가려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할 것이다. <권영민 /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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