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유감 사는얘기

<냉장고 유감(遺憾) >

 저는 냉장고가 원망스럽습니다. 음식을 상하지 않고 신선하게 보관해 주는 냉장고가 왜 원망스럽냐고요? 사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냉장고의 잘잘못을 가리려는 게 아니라 냉장고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그 어떤 사람이 원망스러운 것이겠지요. 어제는 혼자서 밥을 차려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손대야 할지 당황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내 키 높이만한 큰 냉장고에 온갖 반찬그릇과 음식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게 아닙니까? 냉장고에 이렇게 많은 내용물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손잡이가 달려 있는 3단 문에도 온갖 병과 봉지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어느 하나에 손을 대면 마치 도미노 게임처럼 앞으로 와락 쏟아질 것 같아 선뜩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위 칸의 냉동실 상황은 더 험악합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희고 검은 비닐봉지에 쌓인 음식들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손끝으로 눌러보니 딱딱하게 얼어붙은 것이 언제 넣어놓은 것이지 알 수도 없습니다. 중간 플라스틱 칸막이는 무게에 짓눌려 가운데가 부러져 있습니다. 아마 저 중의 대부분은 때를 놓쳐 장기간 보관하고 있는 애물단지로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도대체 냉장고가 왜 이지경이 되었을까 생각해 보니 아내 특유의 저장(貯藏) 본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내는 무엇이든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특이한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집 냉장고의 문제점은 우선 보관 중인 음식물의 가짓수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음식이 냉장고에 있으면 음식을 제 때에 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보관하는 기간도 오래가기 마련이고 따라서 전기료도 많이 듭니다. 더구나 냉장고를 맹신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비록 냉장고가 냉장 기능을 가졌더라도 오래 된 것은 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냉장고에 음식을 많이 보관하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닙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냉장고라고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 집 음식 창고인 냉장고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가에 대해 추리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만들어집니다. 아내는 주로 마트 할인기간에, 식품 코너에서 특정 물품을 특정 시간대에 할인하는 것을 즐겨 이용합니다. 그리고 매장에 가면 먼저 입구에 비치되어 있는 전단지를 면밀히 검토합니다. 싼 곳을 찾아다니기 위해서 입니다. 돼지 양념고기를 사고, 닭도 쌀 때 두 세 마리를 한꺼번에 삽니다. 그리고 아이가 좋아하는 만두나 소시지도 바구니에 담습니다. 특히 덤으로 하나씩 얹어 주는 것은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욕심이 발하여 사기도합니다. 그리고 냉장고에 쟁여놓고는 며칠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심지어는 추석 때 얻어온 떡과 부침개도 녹여 먹으면 되니까 꽁꽁 얼려 놓고 잊어버렸다가 몇 달 후에 발견하기도 합니다. 일단 안쪽으로 밀려든 것들은 잊혀지기 마련이고 오래 동안 한쪽 구석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래서 냉장고가 원망스러운 것입니다. 냉장고가 아니었다면 음식을 바로바로 먹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식구들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고 사는지는 전적으로 아내의 손에 달렸습니다. 된장국을 끓이든지 닭도리탕을 만들든 라면을 먹든 그 결정권은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습니다. 가끔 우리들의 의견을 물어올 때도 있지만 대개 요리에 관한 판단은 아내의 몫입니다. 그동안 냉장고에서 잊혀졌다가 유통 기간이 지나 급히 폐기처분 된 음식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만약 진상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철저히 점검하면 어느 누구는 징계를 받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싸다고 불요불급한 것을 사는 유혹은 이겨내야 합니다. 문 밖에만 나가면 슈퍼가 즐비한 세상이므로 1주일 치 이상의 먹거리도 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냉장고는 간결하고 투명하여 다시 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변해야 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아내는 요즈음 그 흔해빠진 김치 냉장고 하나 없는 우리 집 현실을 성토하고 신세타령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부엌살림의 속내를 모르는 남편의 무심함을 탓하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금년에는 김치냉장고 하나 들여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2006.1.11)



by 리옹 | 2006/01/12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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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enyaflower at 2006/01/25 17:47
김치냉장고가 들어와도 마찬가지일거에요.
아마 김치냉장고속에도 정체모를 음식들이 가득할걸요..
저희집 냉장고도 저래요.. 큰냉장고 하나에 김치냉장고가 둘이나 있는데
셋 다 저 지경입니다.
냉장고를 학대하는 본인들은 모르겠지만
함께 사는 사람으로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에요 -_ㅜ
Commented by bellah at 2006/01/25 18:02
해주는 거 고맙게 여기시고 암 소리 마시고 잘 드세요. ^^
Commented by 아지매 at 2006/01/25 18:11
울남편도 이런 잔소리를 하는데 그집부인이 저보다 한수위시군요 농담ㅋㅋ 혹시 맞벌이 하시는건 아닌지 그러면 시장을 한꺼번에 봐야 시간도 줄이거든요
Commented by 그냥 at 2006/01/25 18:43
우리집 냉장고 사진을 언제 찍었죠 ?
저는 한번씩 뒤져서 오래된 것 그대로 씽크대에 넣습니다.
좀 지나면 씽크대가 치워져 있지요.
Commented by 블로그 운영자 at 2006/01/26 09:41
축하드려요! 엠파스 메인 홈의 "오늘의 화제"코너에 선정되셨습니다 ^0^
메인에 노출되는것을 원치 않으실 경우 blogadmin@empal.com으로 이멜부탁드립니다.
Commented by s656600 at 2006/01/26 13:01
한가지를 찾으려면 냉동실물건을 모두 꺼내야겠군요...
투명한 바구니를 준비해서 종류별로 담아놓으면 찾기도 쉽고 정리도 깔끔하고 마구잡이로 넣는것보다는 여러모로 좋습니다.
하지만 몸에배인 습관은 고치기 어렵더군요.
저희올케가 님의부인과 비슷한데요, 제가 정리해주면 3일이 유효기간입니다
본인이 생각을 바꿔야겠지요
Commented by 니가정리해 at 2006/01/26 14:33
니가 정리해.
Commented by ㅋㅋ at 2006/01/26 14:34
누군 조금 사고 싶지 않나? 바로 해먹을만큼만 사면 쇼핑하는 사람도 편하지. 먹고살기 힘드니까 대량으로 쌀때 사서 해먹는거 아냐.. 그러는 넌 뭘 잘했냐? 시장을 봐와? 냉장고를 치워? 돈을 많이 벌어?
Commented by 권기쁨ㅋ at 2006/05/19 22:12
ㅋㅋ님 -_-욕하지마시지요,처음보는것같은데-_-왜 갑자기욕질이십니까= =
지혼자 태클질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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